“주변에서
저보고 용감하대요” 어려운 형편에 셋째아이를 가진 마흔살 임산부의 해맑은 웃음이 마음을 울린다. 태아명이 “행운이”라니, 그 아이의 앞날에 우리
사회는 행운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나날이 떨어지는 출산율을 높이고자 제정된 ‘임산부의 날’이 올해로 네 돌이 되었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 “하나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던 출산억제 표어는 초유의 출산율하락에 “하나보단 둘이, 둘보다는 셋이
좋습니다”,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은 동생입니다”로 바뀌고 출산장려금지원으로 지자체들이 경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60년대부터
고출산이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고 국가적 캠페인을 벌이다가, 몇 년전부터 갑자기 저출산이 국가재앙이라며 정책전환을 했다. 대대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저출산해소 정책과 예산은 미미했고, 이미 경기침체에 따른 고용시장불안, 살인적인 사교육비, 육아 환경 악화, 사회안전망 미비
등으로 인한 사회환경은 출산장려금 지급이나 보육비 지원 등의 정책으로는 1985년의 합계출산율 2.0수준으로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10대에도 결혼과 출산, 직업취득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30대가 되어서야 겨우 결혼이 가능한 최소한의 여건이 갖춰진다.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 양산이 심화되면 아예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세대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임신, 출산,
자녀양육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요 살아가는 기쁨이라지만 도저히 아이를 낳을 상황이 안되는 사람들에게 들려오는 출산장려구호는 얼마나
무책임한 속빈 강정으로 보일 것인가?
지금 출산을 독려하는 논리는 또 어떤가? 우리 세대의 노후를 위해 국가인구유지, 노동력,
조세대상, 군사력, 소비구매자로서의 기대, 곧 굴레를 씌우려 아이낳기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땅에 태어나려는, 또 이미
태어난 미래세대의 입장과 그들을 낳고 기르는 부모의 입장에서 저출산문제를 바라볼 때, 진정한 해법이 보일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살
생명, 이웃으로서 임신을 환영받고, 행복한 환경에서 출생, 안전하고 사랑받는 육아, 친구가 더 이상 적이 아니며 공부가 유일한 성취의 척도가
되지않는 교육풍토,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사회환경, 의료와 주거, 최소생활수준이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며 장애, 비장애 차별이 없는
사회, 약자배려가 당연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사회구성원들이 이제부터라도 노력해야한다. 한 아이가 잘 자라려면 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저출산해법의 거대담론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생활 속에서 우리 시민들이 해볼 수 있는 이런 실천들은
어떨까?
TV드라마에서 임신출산 불편함 과장장면 시정요청 전화하기, 임산부좌석양보, 임신동료 응원군 되기, 아내와 육아, 가사노동
함께하기, 비정규직해소에 관심기울이기, 해외입양, 국내입양 다시보기, 정부홈페이지에 임신출산지원강화 촉구하기, 출산친화기업 칭찬하기, 사교육비
줄이기 아이디어 모아서 실천하기, 아동 성폭력 추방에 동참하기, 교통안전, 식품안전에 관심기울이기, 환경오염방지 동참하기, 무엇보다 출산친화와
아동청소년정책공약 후보에 투표하고 감시하기 ....등등
최근 몇 년 새 흉흉한 사건들로 아이 낳기 더 무서운 우리사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따뜻한 희망으로 셋째아기를 임신한 ‘용감한’ 마흔살 임산부 행운이엄마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 아이와
온 세상이 서로에게 큰 행운이 되는 일생이 펼쳐지기를 기원하면서.